지난 주말, 오랜만에 판교 CGV에서 “왕과 사는 남자”를 봤다.
영화를 다 보고 난 뒤에도 한동안 마음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는데
보고 나서 머릿속에 계속 남는 건 결국 하나.
이야기의 줄거리나 화려한 장면, 익살스런 배우들의 연기가 아니라,
그곳에 남아 끝내 잊지 않은 사람들, 끝내 외면하지 않은 사람들의 얼굴이었다.
이름 없이 살았지만, 결코 이름 없이 사라지지 않은 사람들 말이다.
그리고, 이 시대의 단종과 세조.
권력의 중심에 선 자들은 언제나 크고 선명하게 기록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오히려 오래 마음에 남는 것은 이름 없이 충정을 지킨 사람들이다.
위태로운 줄 알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던 사람들, 불이익을 알면서도 등을 돌리지 않았던 사람들.
영화는 내게 바로 그들을 다시 보게 했다.
나는 그 장면들을 보며 작금의 현실을 떠올리게 되었다.
지금 이 시대를 돌아보면, 내게 그는 단종과 겹쳐 보였다.
본래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하고, 그 자리를 온전히 지키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흔들렸던 존재.
정면의 우직함만이 아니라, 계산된 말과 절차, 그리고 명분의 외피를 두른 압박 속에 놓인 존재.
억지로 밀어내고, 끌어내리고, 자리를 빼앗으려는 자들 속에서 버텨야 하는 사람.
–
반대로 그런 점에서 지금 어떤 이들이 벌이고 있는 일들은, 내게는 계유정난의 현대적 반복처럼 느껴진다.
제 자리에 있어야 할 사람이 밀려나고, 권력의 칼끝은 정당함이 아니라 계산과 술수 위에서 움직인다.
겉으로는 법의 언어를 쓰고 있지만, 실상은 사법의 탈을 쓴 쿠데타, 정치적 공작처럼 보일 뿐이다.
권력을 빼앗기 위해 내부를 장악하여 법을 휘두르고, 명분을 만들어 언론과 선동으로 판을 짠다.
그 중심에 세조처럼 권력을 움켜쥔 뱀의 눈을 가진 자가 있고,
한명회처럼 세치의 혀로 세상을 뒤집으려는 한 털보가 있다.
물론 시대는 다르고, 인물의 그릇도 다르다.
그러나 역사는 시대만 바뀌었을 뿐, 권력을 향한 집요함 그리고,
그것을 탐하는 얼굴과 방식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역사는 같은 장면을 똑같이 반복하지는 않지만, 유사한 그림자를 남기며 돌아온다.
그래서 더 무겁다.
예전에는 칼부림과 피로 역사가 뒤집혔다면, 지금은 왜곡된 서류와 판결문, 치우친 언론과 침묵으로 뒤집힌다.
그 안의 폭력성은 결코 가볍지 않다.
이런 판을 보고도 “중립”을 말하는 건 솔직히 비겁하다고 본다.
칼이 목 앞까지 들어왔는데, 눈을 깔고 책상만 바라보는 건 중립이 아니라 비겁이다.
깨닫지 못한다면 그건 멍청함이고,
고개 숙인 채 입 쳐닫고 있는 건 신중함이 아니라 비굴함이다.
–
영화가 보여준 것은 권력을 쥔 자들의 이야기만이 아니었다. 그 가운데서도 내 마음을 붙든 건 역시 광천골 사람들과 엄흥도였다.
그들은 아무 힘도 없는 작은 마을의 가난한 주민들이었지만 마지막까지도 단종을 외면하지 않았고,
엄흥도 또한 특별한 지위를 가진 인물이 아니었고, 비록 목숨이 위태로웠지만 끝내 자기 양심을 저버리지 않았다.
그들이 귀하게 보인 이유는 강해서가 아니라,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도 끝까지 사람의 도리를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인상 깊었던 장면이 있다.
황해도 해주에서 단종을 뵈러 온 사람들이 있었다. 멀리서 어렵게 찾아와, 먹을 것을 담아 온 보자기 상자를 강물에 던지던 장면이 유난히 마음에 남았다.
가까이 갈 수 없으니, 멀리서라도 전하려 했던 그 간절함.
닿지 못할지라도, 마음만은 닿기를 바랐던 충정.
나는 그 모습에서 오늘날 먼 곳에 살면서도,
미국 등 머나먼 타지에서 그를 지지하는 교포들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몸은 비록 멀리 있어도 마음은 떠나지 않은 사람들,
조국이 무너지는 꼴을 그저 방관하지 못하는 사람들,
오히려 멀리 있기 때문에 더 절실하게 조국을 바라보는 사람들.
문득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결국 우리도 다르지 않다는 걸. 억지로 자리에서 밀려나고, 멀리 떨어져 있으며, 그를 아끼는 사람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그를 잊지 못한다.
그리고 지금 이 땅의 많은 국민들, 윤어게인을 외치는 사람들은 결국 어쩌면,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엄흥도이고, 누군가의 광천골 사람들인지도 모르겠다.
–
지금 우리 앞에도 창호지 넘어 단종의 목에 걸린 줄이 하나 놓여 있다.
우리는 지금 어떤 줄 앞에 서 있나.
영화 속에서는 누군가가 줄을 잡아당겼고, 그 줄 끝에는 한 사람의 비극이 매달려 있었다.
누군가는 그 줄을 당기라고 한다.
분위기에 휩쓸려라, 침묵해라, 적당히 눈치 보며 살아남으라고 한다.
거대한 권력의 이름으로 역사가 움직이는 것처럼 보일 때도,
실제로 시대를 견디게 하는 것은 조용한 양심과 작은 결심일지 모른다.
대단한 영웅이 아니어도, 자기 자리에서 외면하지 않는 사람.
적어도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고도, 끝내 침묵하지 않는 사람.
어쩌면 그런 사람들이 역사의 마지막 줄을 붙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결코 그 줄을 당기지 않을 것이다.
–
돌아오는 길에 계속 이런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고개 숙인 채, 책상만 보며 살아가지는 않겠다.
입 닫고 눈 가리고, 숫자와 기사 제목 뒤에 숨지 않겠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조용히 살 수는 있다.
하지만 비굴하게 살고 싶지는 않다.
침묵하며 눈치 보는 삶은 편할 수 있어도, 결국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제 본격적으로 내 목소리를 내려한다.
편안함을 위해 침묵하는 대신, 불편하더라도 내 목소리를 내겠다.
누가 뭐라 하든, 불이익이 오든, 손가락질을 하든, 적어도 비겁한 쪽에는 서지 않겠다.
큰 목소리가 아니어도 좋다.
다만 비겁한 침묵으로 스스로를 속이지 않겠다.
거창한 영웅이 되겠다거나 하는 선언은 아니다.
다만 비겁하게 침묵하는 사람이 되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척하는 말이 아니라, 이제는 피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담담한 각오다.
보고도 못 본 척하지 않겠다는 것,
느끼고도 아무 말 하지 않으며 지나가지 않겠다는 것,
그리고 끝까지 기억하겠다는 것.
역사가 반복되는 순간마다, 늘 사람들은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지만, 사실 많은 경우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이 아니라 그냥 입을 쳐닫았던 것뿐이다.
나는 그 편에 서고 싶지 않다.
엄흥도가 남긴 메시지,
”위선피화(爲善被禍), 오소감심(吾所甘心).”
선한 일을 하다가 화를 당하더라도, 달게 받겠다.
이 말이 오늘은 유난히 무겁게 다가온다. 그러나 동시에 이상하리만큼 담담하다. 결국 사람이 끝까지 붙들어야 하는 것은 안락함이 아니라 옳은 마음인지도 모른다.
살다 보면 옳은 편에 서는 일이 늘 안전하지는 않다.
때로는 손해를 보고, 때로는 오해를 받고, 때로는 괜한 화를 입기도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켜야 할 것이 있다면, 결국 사람은 그쪽으로 걸어가야 한다고 믿는다.
–
지난 주말, 오래 생각했다.
그리고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다.
역사는 반복된다.
세조 같은 자들은 늘 있고, 한명회 같은 자들도 늘 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시대가 우리에게 침묵을 권할 때,
그 사실을 알고도 침묵을 그대로 받아들일 것인지 아닌지다.
좋은 사람이란 거창한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끝내 잊지 않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멀리 있어도 마음을 보내는 사람,
두려워도 끝내 외면하지 않는 사람,
다들 침묵할 때 조용히 자기 목소리를 내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결국 역사를 버티게 한다.
끝내 세상을 떠받치는 건 이름 없는 사람들의 마음이다.
엄흥도 같은 사람, 광천골 같은 사람, 그리고 끝까지 잊지 않는 사람들이다.
오늘의 시대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들이 사라지지 않았다고 믿는다.
우리는 거창한 이름으로 남지 않더라도,
누군가의 엄흥도일 수 있다.
누군가의 광천골 사람들일 수 있다.
그리고 나 역시, 그중 하나가 되려 한다.
적어도, 조용히 내 자리에서라도.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나와 마음이 맞지 않은 분들께,
“안녕히 가시라.” 작은 인사를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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