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인의 열정을 먹고 사는 사람들
20대 초중반 내 꿈은 원래 그림 그리는 환쟁이었다. 지금 같은 그림 파는 아저씨가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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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초였다. 시카고에서 돌아오자마자 유학 포트폴리오 학원이라기엔 부족한 강남의 한 오피스텔을 임대해서 운영하는 곳을 등록하게 되었는데 두세 달 정도 다녔을 거다. 그런데 웬 가르쳐달라는 미술은 안가르치고 온갖 협작 꼼수만 가르치길래 이거 예술에 절박한 친구들이나 돈 많은 돌 덩어리들 속여서 돈 버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미 시카고에서 지역 미술학교 교장할매네 집에서 살면서 그림을 배웠던 터라 미국식 미술 교육이 어떤지 대략은 알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무슨 눈을 감고 그리라느니, 도화지를 보지 말라느니 (Blind Contour Drawing은 개소리다. 20세기 유행했던 드로잉 스타일일뿐 기본기 향상엔 일절 도움이 안되는 연습 방법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사람 유학 장사꾼이 맞았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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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그간 그림 배우려고 힘들게 모은 돈만 버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점점 들었고, 성의 없는 그의 수업에 결국 졸업에 집중한다는 핑계를 대고 그만뒀다. 다행히 한국 돌아올 준비하면서 신청했던 미술교육과 복수전공이 승인이 된 덕분에 미술 과목 교원자격증 취득과 함께 미술 실기부터 이론공부까지 나름 사범대 코스로 수준 높은 교수님들, 학생들에게 미술을 배운 셈이었다. 게다가 어차피 졸업은 해야했으니 추가적으로 나가는 등록금은 없었다. 물론 그 뒤로도 기본기를 배우려고 몇몇 입시학원에 가서 고딩들 틈바구니에서 고군분투하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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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정국으로 모든 게 멈춰버린 요즘 오랜만에 그 사람 뭐하고 있나 문득 생각이 나서 찾아봤다. 그래도 이제는 어느정도 미술쪽 돌아가는 모양새를 안다면 알고, 냄새만 맡아도 느낌이 조금 오는데 이거 영, 이 사람 경력위조 냄새가 난다. Pentagram 디자이너에, MoMA 아트 디렉터…ㅠ SVA 나와서? 게다가 그 나이에 경력 15년? 찾아봤지만 아무런 정보도 나오지 않는다. 유학 장사야 업이니까 그렇다쳐도 경력위조는 정말 아니다싶다. 특히 더 안타까운 건 거기에 속는 죄 없는 학생들, 자식들 꿈을 이뤄주고 싶어서 비싼 학원비 내가면서 애쓰시는 그들의 부모님들이다. 그리고 그때의 내 모습이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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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쯤인가 영국 Royal College of Art 학생이 포트폴리오를 보내와서 몇 안되는 한국인이라 반가운 마음에 본 기억이 있는데 스타일이 어디서 많이 본 스타일인 거다. ‘아 그때 그 사기꾼.’ 그래서 물어봤다. “강남에서 포폴 준비하셨죠?” 맞단다. “그 사람이죠?” 또 맞단다. 어쩐지 기본기는 없고 그래서 밀도나 완성도는 부실한데 특정 스타일만 잔뜩 주입됐더라. 솔직히 RCA를 어떻게 들어갔는지 놀랐다. 그림 그리던 때의 내 포폴에 미안함이 느껴질 정도. 유학파? 사실 개털이다. 취향과 콧대만 잔뜩 높아질 뿐 작품 퀄리티 향상은 오로지 작가 본인 몫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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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나도 활동 범위를 넓히려고 준비 중이라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그리고 코로나 정국만 아니었으면 한창 이곳의 콧대 높은 갤러리 할배들에게 어눌한 불어와 함께 실없는 눈웃음이나 쳐주면서 무시 당하고 다녔겠지만 그렇게 실패하고 굶어 뒤질지언정 절대 저런 사기꾼은 되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든다. 그 사람 언젠가 기회되면 꼭 다시 한번 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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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읽어주신 극소수 지인분들께, 절대 우유부단하게 타인의 달콤한 말에 넘어가지 마시길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6032020 #타인의열정을먹고사는사람들 #미술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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